<유현숙의 위로와 화해>
징검다리 놓기
유현숙 임상심리전문가/인지행동치료전문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다.
“지금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배우자와, 자녀와, 어머니, 아버지와, 형, 누나, 동생과, 직장 상사, 동료와, 친구, 연인과의 관계가 편안하신지? “네, 모두 편안합니다”라는 답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을 그냥 지나치셔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머릿속에 현재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는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과연 우리 관계의 문제는 무엇일까?
심리상담에서는 관계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한 중년 부인이 공황장애 증상을 호소하며 상담을 받으러 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혼생활 내내 배우자가 자신의 원가족을 늘 우선순위에 두고 내담자의 희생은 당연시했다고 한다. 내담자는 최선을 다해 배우자와 시댁의 요구에 맞추어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극심한 분노와 불면증, 때때로 숨을 쉬기 어려운 공황증상이 찾아왔다. 그런가 하면 어떤 대학생은 학창시절 또래관계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 부모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자기 편이 되어주지 않아 고통스럽게 학교에 나갔던 기억이 몇 년이 지나도록 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결과 객관적으로 준수한 성취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존감과 무기력감,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원망감이 이 젊은이의 일상을 지배하는 주 감정이 되고 말았다. 이뿐이랴.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서 서로의 감정을 잘 바라보지 않고 인정하지 않아 갈등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첫 번째 사례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시댁 위주로 모든 생활이 돌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이제 우리 가족만의 생활을 꾸려갔으면 좋겠다고 부탁하고 요구했을 때 남편은 그 생각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고 함께 바꾸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내담자의 경우에는 부모님이 문제 해결에 나서기 보다는 ‘그래도 학교는 가야 한다’(때로는 '네가 뭘 잘못한 건 아니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다른 사례들도 대부분 ‘다름’을 ‘틀림’으로 평가하며 상대방의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치부하는 데서 오는 갈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경우에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상대방의 요구를 다 들어주긴 어려울 것이다. 서로 살아온 배경이 다르기에 가치관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때마다 다른 입장을 이해하면서 배려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우선 관계를 잇기 위한 한 마디가 중간에 징검다리처럼 놓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마법의 한 마디는 바로 “그랬구나”다.
실제로 첫 번째 사례에서는 다행히 배우자도 함께 방문했길래 따로 면담을 하면서 딱 한 가지만 당부했다. 아내가 어떤 점이 힘들고 화가 나는지 이야기할 때, 남편은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그렇구나”라고 말해주십사 하는 거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당신 입장에서는 그 상황이 화가 나고 불쾌했구나, 억울했구나”하고 감정을 읽어주면 더 좋겠다고 했다. 배우자 뿐 아니라 내담자도 우선은 “당신 입장(당신이 살아온 배경)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라고 먼저 말한 뒤에 자기 주장을 하도록 당부했다.
두 번째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녀가 원망감을 호소할 때 “우리도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어, 이제 시간이 지났으니 그만 잊어버리렴”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랬구나, 당시에 많이 힘들었겠구나, 우리가 사느라 바빠서 잘 몰랐단다. 이제라도 사과하고 싶다. 미안하다”라고 꼭 말씀해주십사 부모님께 부탁드렸다. 그리고 당사자들이 어색하더라도 그렇게 소통했을 때, 불과 몇 주 만에 내담자들의 증상은 상당한 호전을 보였다.
필자는 이처럼 관계를 보다 부드럽고 가깝게 만드는 한 마디를 징검다리에 비유하고 싶다.
징검다리의 돌들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모양이듯이 “그렇구나”라는 말을 기본으로 해서 다양하게 바꾸어 쓸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 힘들었지? 고생했어”,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같은 말들이다. 흔히 ‘예쁜 말’이라고 하는 모든 언어가 이에 해당한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한 줌의 폭신함을 누리고 싶다면, 사이 좋게 나이 들어가는 미래를 꿈꾼다면 지금이라도 진심을 담아 시도해보기 바란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네”, “오늘도 고생했어”,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라고..
▲ 유현숙 임상심리전문가/인지행동치료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