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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 포기하지 않아

<유현숙의 위로와 화해>
절망과 불행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10살난 아들이 최근 말했다. "다들 자기보다 잘 하는 것 같고, 많이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요즘 공부 선행을 어디까지 하고 있나 말하는게 유행인 모양이었다. 자기는 잘 하는 것도, 잘난 것도 없는 것 같다며 실패한 인생이란다.
울적해하는 아들에게 나는 최선의 위로를 건넸다. "넌 태도가 좋고 성실한데,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아들은 그 말들 모두를 하나, 하나 부정하면서 절망의 증거만 찾으려 했다. 이내 지친 나는 “엄마도 슬퍼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엄마, 거의 다 왔어. 여기서 포기하지 마”라고.


이런 장면은 상담실에서도 매일 벌어진다. 공부나 일을 중단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 관계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이들…. 벼랑 끝에 서서 더 못 버틸 것 같다며 포기하고 싶다고 한다. 포기하고 싶은 것이 일이나 학업, 사람과의 관계라면 차라리 낫다. 종국에는 삶 자체를 포기하고 싶다는 이들을 마주할 때면 상담자도 함께 절망과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알고 보면 그 사람에겐 우리 아들처럼 장점이 꼭 하나는 있고, 가진 것이 생각보다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절망의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강점과 자원을 하나도 보지 못하게 마련이다.


상담을 막 시작했을 때는 그들이 하는 절망의 말들을 모두 반박하려고 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강점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터널 속에 있는 사람에게 긍정과 희망의 말들은 저 멀리 밖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희미한 빛을 바라볼 힘이 없어서 바로 눈앞에 짙게 드리운 어둠을 더 믿는 것 같았다.


상담 경력이 조금 쌓인 지금은 더 이해하고 기다려 보려고 한다. 그들이 절망에 이르게 된 궤적을 하나, 하나 같이 되짚어 보며 현재 느끼는 절망에 깊게 공감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았던 일들이 쌓여 결국 암담한 심정에 놓이게 됐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누군가 그 과정을 판단하지 않고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며 함께 안타까워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힘을 얻게 마련이라는 점을 배웠다. 그렇게 깊은 절망을 온전히 공감받고 수용 받은 후에야 사람은 비로소 한 발짝 뗄 힘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더 중요한 건 기다림이다. 지금 당장은 힘이 들어서 절망의 안경을 벗을 생각도 못 하지만, 잘 먹고 잘 자며 조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저절로 그 안경은 벗겨지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식사를 제때 챙기고, 잠을 제시간에 자는 것에 더 집중하도록 돕는다. 몸이 조금 편안해지면 기운이 나고, 기운이 나면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무리하게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게끔 도와주기도 한다. 어쩌면 누군가를 살리는 건 그저 묵묵히 뒤에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믿으며 기다려주는 한 사람의 존재가 아닐까 점점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런 돌봄 속에서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된다.
 


사진 <유현숙 임상심리전문가/인지행동치료전문가>

심각한 저출산과 인구감소 문제에 대해 누리꾼들이 우스갯소리로 “있는 사람부터 잘 지키자”라고 하는 말을 보았다. 몇 년 사이 많은 젊은이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이 벌어졌고, 소득불균형과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국민 행복도가 낮아지고 있으며,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가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절대 가볍지 않은 말로 다가온다. 절망과 불행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여기는 낭떠러지가 아니라’고, 떨어져도 쿠션이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사람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그들의 절망을 깊이 이해하고 살아갈 힘을 믿어주며 기다려주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안전감과 연대감이 절망에 빠졌을 때 나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살릴 것이라고 믿는다. 

글 유현숙 임상심리전문가(인지행동치료 전문가)